쉬는 토요일, 10시가 다 되어가도 아침은 고요하기만 합니다. 일주일 내내 동동걸음을 쳤던 남편과 아이들이기에 그냥 놔두고, 20년을 넘게 일찍 일어나는 일이 습관처럼 되어 있어 혼자 뚝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가족들이 깨어나면 먹을 수 있도록 식탁을 준비해 두고 난 뒤 TV 앞에 앉으니 뉴스특보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확인을 위해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니 마찬가지였습니다. 곤히 자고 있는 남편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여보! 여보! 일어나봐 큰일 났어.”
“응. 왜? 무슨 일이야?”
“저것 봐! 노대통령이 ....노대통령이.....”
나는 말을 잇지 못하였습니다.
“뭐가 어찌 되었다는 거야?”
자막을 보고는 놀라 벌떡 일어납니다.
조금 후, 모든 방송이 중단되고 특집방송으로 노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알렸습니다.
남편은 8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도 운동권 학생이었습니다.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고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 사람이라 늘 반대편에 서서 손가락질을 받곤 했습니다. 오랜 한나라당의 텃밭과도 같은 경상도 땅에서 민주당을 지지하면 그건 바로 간첩과도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말입니다. 시골 친척들이 모이는 명절에 어른들이 노대통령에게 안 좋은 말을 할 때에도, 그건 아니고 이래서 그랬다며 상세하게 설명을 해 주곤 했습니다. 그러다 나중엔 큰 소리까지 나는 사태가 벌어지곤 했었습니다. 남편은 지방 민주당사에서 몇 년 근무를 하면서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온 종일 TV 앞에서 시선을 고정한 남편의 휴대폰은 연방 울어댑니다.
이제 당을 떠나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남편이지만, 마음속에 담은 그 사랑은 어쩔 수 없었기에 전화기를 들고 기운 없는 목소리로 고맙다, 감사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정치와 아무런 관련도 없었던 친구도 전화를 해
“술 한잔 할까?”
“됐어. 말이라도 고마워.”라며 전화를 끊습니다.
내가 남편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었습니다. 가만히 곁에 앉아 TV를 바라보는 것 외에....
일요일 아침, 끼니도 제대로 먹지 못한 남편이
“여보!
과일 좀 사 줄 수 있어?”
“뭐하게?”
“응. 시청 앞에 임시 분양소를 차려야 할까 봐.”
그러자 남편의 핸드폰으로 노사모 회원의 메시지가 날아들었습니다. 함께 모여 분양소를 만들자고...바로 뛰어나가는 남편이었습니다.
▶ 노대통령과 악수를 나누는 남편(가장 존경하는 분이라 늘 말을 합니다.)
하루 종일 먹먹한 기분으로 집에 앉아있으니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옵니다.
“여보! 아이들 데리고 한 번 와 봐!”
“그럴게.”
아들을 데리고 시청 앞에 도착하니 제법 사람들이 많이 와 있고, 저녁도 먹지 않고 서서 오시는 분들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존경하던 분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그 안타까움은 분위기로 눈치 챌 수 있었습니다.
스크린으로 노대통령의 정치활동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오가는 사람들 발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집중하였습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 하얀 국화 한 송이를 받쳤습니다. 잔잔하게 웃고 나를 바라보는 그 모습에서 정치를 잘 모르는 주부이지만 눈물이 핑 도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정중하게 두 번의 절을 올리고 뒤로 물러섰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이들 손을 잡고 온 가족들의 행렬은 밤이 늦도록 끝이 없었습니다.
▶ 감히 카메라 플래시 불빛조차 내기 어려워 멀리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큰 도심에서 1~2시간을 기다려 조문한다는 것과는 대조적이지만,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멈추어 서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아침, 입관식을 했다는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그저 죽음 하나만으로도 숙연해지는 아침입니다. 정치인으로서, 대통령으로서의 모진 삶에서 일반 소시민으로 돌아와 더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으련만, 이유야 어찌되었던 남편과 아버지로써의 책임감을 다 하며 고스란히 안고 떠나시는 분이라 더 존경할 수밖에 없다고 말을 합니다.
이념을 뛰어넘어 분향소를 찾는 시민들의 행렬로 보아 뿌리깊이 내려앉은 한나라당의 텃밭에도 새로운 싹이 돋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제 모든 시름 내려놓고 편히 쉬세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